말씀: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께 영광!

성경: 이사야 12:1-6

12: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12: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12: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12: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12:6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1. 희망

왓츠의 희망이란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유명하면서도 매우 의미 있는 그림이다. 지구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이 그 소재인데 그 여인의 눈은 앞을 볼 수 없게 붕대로 감겨져 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하나의 줄만 남겨 놓고 모두 끊어진 하프가 들려 있다. 그 끊어진 줄은 산산이 부서진 그녀의 기대를 재현시키는 듯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줄 하나가 바로 희망을 상징하는 줄인 것이다. 그녀는 그런 와중에도 승리감에 넘쳐 하프의 마지막 남은 줄로 연주를 한다. 그리고 거기서도 아름다운 멜로디는 흘러나온다! 나의 삶은 어떠한가? 환경을 바라보며 원망하는 삶이 아닌 허락된 환경 가운데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에도 날마다 희망이 넘쳐나며,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여 충성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감사의 노래

앞장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심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 다음 장인 본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함으로 성도는 노래를 불렀고 그 구원이 완성되는 날 또한 큰소리로 찬양할 것이다. 본장은 남은 자들이 모두 돌아와서 기뻐하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날에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영원한 기쁨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1-3). 또한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남은 자들이 돌아와 온 천하에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며 선포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4-6).

 

3. 감사로 주께 나아가(1-3)

우리는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의 삶이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회개하고 주 안에서 늘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감사로 나아간다면 어두움의 권세도 힘을 잃게 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실 것이다.

 

감사

어떤 철학자들은 세상을 저주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슬퍼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계를 존귀하게 여기며 삶을 기뻐한다. 그러나 만일 창조가 없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그런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곳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와 그를 지으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수도 있고, 우리를 징계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을 때는 불평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임하면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12:1) ‘노하셨사오니는 말이 콧바람을 불거나 씩씩거리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 격노한 상태를 의미한다.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노하심이 그치고 은혜가 허락된다면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게 된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약하게도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11:16)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에게서 자유케 되었을 때 그들은 주님의 행하심 앞에서 주를 높이고 주께 감사의 고백을 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25:1)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주를 높이고 찬송해야 한다.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는 누구인가? 이사야는 Esaias(인명) (Why:[]v'y], Esaias)여호와의 구원의 뜻을 가진다.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주로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며 이사야서의 저자이다. 그는 말씀에 의한 최초의 본격적 대선지자였다. 그의 문필 활동은 역대하 26:22, 32:32, 8:1, 16, 30:8, 34:16 등에 표시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이사야서 그 자체이며, 그 용어의 풍부함, 문체의 힘과 격식, 문학적 기교의 다양성 등은 본서를 히브리 예언 문학의 최고봉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 문학적 소양으로 미루어 확실히 그는 서민적이 아닌 듯 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상징적사물의 이용이나 환상은 적고, 문필변설의 재능이 탁월했지만 그의 예언은 단순한 추상적 철학이나 명찰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대의 유다 왕국 사상최초의 국제적 위기를 큰 스케일로 예언의 상징이나 예표로서 사용했다.

수리아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입(7)에 의해 앗수르의 모습을 빌어 구원, 심판, 메시야, 잔류자 등에 관한 예언이 흘러 나왔다. 앗수르 왕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와 기적적 패퇴(36, 37)에 의하여 포로와 귀환의 복음이 흘러 나왔다. 병든 히스기야 왕에게 보낸 바벨론 왕 므로닥 발라단의 사절(38, 39)에 의해 마찬가지로 포로와 귀환의 복음이 뒷받침되고 있다. 특히 이사야서에 있어서 여호와의 종, 메시야의 수난과 영광, 여호와와 메시야의 지배하에 있는 전 세계의 종말적 역사관, 그 안에 위치가 정해진 교회의 모습 등 제재가 풍부하고 시야가 넓은 선지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또 그의 위대한 인격, 정치가적 재능, 유대 역사의 위기에 직면하여 조국을 위해 진력한 공로, 후세에 끼친 위대한 감화는 실로 선지자 중의 선지자임을 느끼게 한다.

 

긍휼히 여기시는 주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떠한 자들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를 범죄 함으로 왜곡시키고 망가뜨렸다.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저주 아래 놓이게 되고 말았다. 인간의 범죄는 인간 자신과 세계를 죽음 아래에 놓이게 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슬퍼하셨다. 하나님은 그 범죄로 말미암아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저주 아래 놓이게 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자기를 떠난 인간을 긍휼히 여겨 주셨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시고 삶의 주인이 되신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12:2)

주님을 신뢰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신뢰의 의미는 순간적이며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성심을 다해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좋으신 주님을 신뢰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우리의 반석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26:4)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면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됨을 믿어야 한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49:10)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고 불안해 보일지라도 주께서 의 삶을 인도하시면 가 안전하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118:14) 여호와께서 힘과 능력이 되심을 선포하는 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께로 나아가면 우리는 주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12:3) 주 안에는 기쁨이 있고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빛 되신 주를 좇는 삶, 생명이 되신 주를 믿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36:9) 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주께서 에게 기쁨을 주시고 생명을 허락하시는 역사가 있게 됨을 믿어야 한다.

 

4. 주께 찬양 드리며(4-5)

우리는 좋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일들 앞에 감사함으로 나아가며, 그 분을 높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피조물들에게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신 좋으신 주님이 되신다. 어느 누구든지 주님과 관계없이 살아왔던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어 들이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은 추상적이거나 비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주님의 긍휼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인데 인간에 대한 구원으로 현실화되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했음을 의미한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 및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먼저 주를 믿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좋으신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주님의 행하심 앞에 우리는 주님을 높일 수밖에 없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12:4) ‘높다 하라.’의 의미는 들려지다, 존귀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는 권위와 능력이 높이 평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권위와 능력이 있으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그분은 평강의 왕이 되신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6-7) 우리는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가운데 모시고 천국 백성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주께 감사하며 주님의 행하심을 만민에게 전하는 자들로서 살아가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대상 16:8)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모든 만물이 영광을 돌리는 날이 오도록 우리는 힘써 기도해야 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9-11)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여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찬양

하나님의 창조와 긍휼과 구원에 감사를 표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입술로 하는 찬양일 것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통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힘과 정성을 다해 주를 찬양하고 다양한 악기를 다 동원하여 주를 찬양해야 한다. 주님은 포로 된 자들을 자유하게 하시며 백성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 주님을 찬양하며 좋으신 주님을 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12:5)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57:5) 온 땅 위에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데서 부터 해 지는데 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113:1-3) 영원토록 높임을 받으실 주님을 찬양하며 온 땅에 주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실 그 날을 기대하며 자신이 속한 곳에서 충성된 종으로서 주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5. 여호와를 찬양하는 삶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의 삶을 반드시 인도해 주실 것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번 선택한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 분의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나타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셨을까?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감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때일 수 있다. 이때가 바로 주님의 이름을 높여야 할 기회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좋으신 주님을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세상에서 제일 크신 살아계신 주님이 되신다.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12:6) 우리는 이 좋으신 주님을 소리 높여 불러야 한다.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71:22) ‘를 구원하시고 의 삶을 인도하실 주님을 찬양하며 그 분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6.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요일 4:9),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천국백성의 삶을 살게 됨을 믿고(고후 5: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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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성경: 요한12:12-17

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2: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 태공망 여상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태공망 여상은 주문 왕 때 출세의 가도를 달렸으나 젊었을 때는 대단히 가난했다. 그런데도 밖에 나가 일할 생각은 않고 독서삼매의 나날을 보냈으므로 집안이 엉망이었다. 이때 부인은 생활에 지쳐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이름을 떨친 여상에게 어느 날 부인이 나타나 다시 살게 해달라고 했다. 이때 여상은 잠자코 물이 담긴 그릇을 엎지르고는 저 물을 그릇에 다시 담아 보시오.’하였다. 그러나 물은 흙 속에 스며들어 버렸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무언가를 하다가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쉽게 주님을 저버리지는 않는가? 세상을 더욱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만 최고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1-6). 새 계명은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다. 어두움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듯이 빛과 사랑도 함께 존재한다(7-11). 이러한 교제의 삶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에게 다 해당된다(12-14). 성도들은 세상을 사랑치 않아야 한다(15-17).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출현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의 약속을 믿고 의를 행해야 한다(18-29).

 

3. 죄 사함 받은 주의 자녀

우리는 어떠한 은혜를 받은 자들일까? 우리는 원래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할 죄의 속성을 지닌 자들이다. 그 죄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인류가 죄 아래 있다는 사실과 역사적 예수의 위치는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이다.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까지 부여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았음을 말한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일 2:12) 예수님께는 어떤 권세가 있는가? 예수님은 죄를 사할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어느 날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가 지붕을 통해 내려졌다. 친구들에 의해 천정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가 친구들의 믿음으로 인해 고쳐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20) 한 번은 향유 옥합으로 예수님을 씻어드린 죄인이었던 여인에게 주님은 죄를 사하여 주신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7:47-50) 사람들은 죄 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불만을 가졌으나,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 분명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구원이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4:12)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나아가야 한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10:43) 의 삶에서 작게 또는 크게 지은 죄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께 죄를 자백하면 죄를 사하여 주심을 믿고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주님 앞에 나아가 죄 사함 받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4. 견고한 믿음가지고 마귀를 대적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영적전투를 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마귀를 대적해야 할까? 주 안에서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은 신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고 또 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한다. 여기서 악한 자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악한 자는 마귀를 가리키고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싸우는 사람들이며 이를 위해서는 믿음에 견고히 서야만 한다. 믿음에 견고히 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피하여 숨는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반드시 주님이 도울 것이며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됨을 믿어야 한다.

요한은 아비들에게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고, 청년들에게 악한 자를 이기었음을 말한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3)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복을 받았음에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아는 은혜에 관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 아버지는 아들을 알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는 아버지를 알게 된다. 주님이 주신 은혜로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게 되었음은 놀라운 일이다.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지 못한다. 세상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의 자녀의 신분에서 벗어나야 한다. 악한 자에게 속아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삶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 악한 자의 지배를 받게 되면 악한 행위의 결과를 낳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죄인들도 사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화목 제물이 되신 좋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 되신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를 지시게 될 즈음에도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사랑의 주님이 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근신하여 깨어있어 주님처럼 기도하며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8-9) 영적 전투에 임하는 주님의 군사로서 전신갑주를 입고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10-12)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영적전투에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5.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어디에 거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예수님의 참 제자는 어디에 거하는 자들일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참 제자에 관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8:31) 주의 말씀 안에 거하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은 주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6:10)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우리는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함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말씀이 안에 풍성히 거할 때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 갈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3:16) 늘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 삶을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6. 세상을 사랑치 말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본문에서 세상이란 용어는 하나님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음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로서의 세상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런데 본문은 세상을 사랑치 말라고 한다. 이때의 세상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이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가리킨다. 하나님 없는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주인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세상을 그리스도인은 사랑하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 본서가 하나님과 세상을 날카롭게 대립시킨 것은 헬라어의 특성에 기인한다. 헬라 사상은 본래 영과 육, 세상과 천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다. 세상과 육은 저급하고 악한 것이고, 천상과 영은 고급하고 선한 것이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끊임없이 세상과 육을 벗어던지고 영의 세계인 천상에 이르고자 한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을 가진 헬라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본 서신에서도 세상과 하나님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래 성경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단지 세상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우리는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 하나님과 대립하는 일체의 존재의 의미로 기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멀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우리는 주님만을 잘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9)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을 각오하되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우리는 어떠한 신분으로 살아가는 자들인가? 확실한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감을 말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로서 살아갈 것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이 땅 가운데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며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위의 것들을 바라보는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3:1-2) 예수님을 믿는 자는 반드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결코 세상가운데서 승리하게 됨을 선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요한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말한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시다. 천지는 없어지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102:26)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없어지고 변하지만 주 안에는 영원함이 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된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우리는 삶의 어떠한 것들 중에서도 최고 우선순위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우리는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라고 고백한 다윗의 기도처럼 언제나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143:10)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8.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요일 4:9),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천국백성의 삶을 살게 됨을 믿고(고후 5: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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