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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TV/설교문 | Posted by 데일리 푸드 2016. 10. 8. 20:11

하나님을 섬기는 삶, 전도서 2:21-26

말씀: 하나님을 섬기는 삶

성경: 전도서 2:21-26

2: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22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2:25 ,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1. 시간

영국의 정치가이자 나폴레옹을 격파하기도 한 장군 웰링톤이 한번은 어느 고관과 런던 다리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에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러나 고관은 5분이나 지나서 도착했다. 그가 조금 불쾌하게 생각하자 고관은 각하, 겨우 5분밖에 늦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겨우 5분이라고? 그 시간 때문에 우리 군대가 패전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라고 타일렀다. 그 후 또 그와의 약속을 하게 되었다. 그때 고관은 일찍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당신은 시간의 가치를 모르고 있군요. 아까운 5분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라고 꾸짖었다. 우리는 시간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주 안에서 의미 있게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2. 소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싶어 하는가?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는 원하는 것들을 가질 수도 있고 못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소유의 크고 작음이 인생의 행복이 있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가이다. 본장에서 전도자는 인생의 헛된 추구로 인한 절망과 무의미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전장에서 인생과 만물의 헛됨을 고백한 저자는 본장에서 허무함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교훈들은 솔로몬의 삶이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다. 우리는 어떠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많은 것들을 추구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술을 통해 쾌락을 구하고, 어떤 이들은 정욕을 통해 쾌락을 추구한다. 이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 부를 쌓고 큰 집과 많은 노비들, 보석들을 사들이며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즐기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헛되며 결국엔 허무함만 가져다 줄 뿐이다(1-11). 또한 남들보다 뛰어난 지혜를 지닌 자라도 인생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죽음 앞에서는 다 똑같은 존재이다(12-17). 그러므로 일평생 애쓰고 노력한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18-23). 결국 사람의 참된 행복은 심령에서 나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만이 소망을 가질 것이다(24-26).

 

3. 수고와 노력(21-23)

무엇을 얻고자 하는 수고와 그 노력은 모두 잘못된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하나님은 게으른 자를 싫어하시며 성실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열심히 일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인생의 수고가 헛되며 악한 것은 그 수고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데에서 선과 악으로 갈리게 된다. 만약 우리의 수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사는 자들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곳에서 수고의 땀을 흘리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간의 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겪는 수고는 얼마나 많은가? 전도자는 어떤 이는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들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게 됨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2:21) 자기가 수고한데로 소득을 얻고 영원토록 그 소유한 것에 대한 보장이 된다면 좋을 것이나 꼭 그렇지만은 않기도 하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기록한다.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 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2:21)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므로 우리의 소유에 대한 보증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한 평생을 살아가며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 한 왕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여호야김이다. 그는 이십 오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십 일 년간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며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여호야김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 년을 치리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대하 36:5) 한 나라의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갔던 여호야김의 삶을 볼 때에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들에게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살아가야 한다.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죄인 하나가 많은 선한 것을 망칠 수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괴케 하느니라.”(9:18) 지혜는 전쟁무기 보다 낫다. 표준 새 번역은 이렇게 기록한다. “지혜가 전쟁무기보다 더 낫지만, 죄인 하나가 많은 선한 것을 망칠 수 있다.”(9:18)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겪는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주님의 편에 서서 승리하는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한다.

 

해 아래에서 행하는 수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해 아래에서 살아가며 많은 수고를 한다. 하지만 피조물로서 해 아래에서 행했던 모든 수고가 헛되다면 어떻게 될까? 전도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2:22) 수고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양식을 얻기 위해 노동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수고가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방향의 것들이 되어 주님이 주시는 기쁨 가운데 넉넉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어떠한 것들보다 주님만을 최고로 사랑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돈이 많으면 모든 것들을 다 행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참 만족이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전도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5:10-11) 돈이 많은 자는 관리해야 할 사람도 많으니 결국 그가 가진 많은 돈은 눈으로 보기에만 좋은 것일 뿐이다. 우리의 삶에서 돈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평온함이다. 전도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4:6) 우리는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여 바람을 잡으려는 삶을 살지 말고 한 손에만 가득하나 평온함이 넘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일평생에 근심

는 지금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근심하고 있는가? 날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걱정만 한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전도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23) 부자의 삶이 좋기만 할까? 그의 삶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걱정하느라 고민이 많을 수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전도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5:12) 우리는 근심이 많을 수도 있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 가운데 단잠을 잘 수 있음을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고 해 아래에서 무의미한 수고하는 삶이 아닌 주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영혼의 주인(24-26)

우리의 영혼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이 땅 가운데서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전도자는 먹고 마시는 육체의 쾌락을 온전히 헛되다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전도자는 육체의 기쁨에 더하여 영혼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라면 참된 보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영혼의 만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육체의 만족을 얻는 일은 결코 상반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주인이 되심과 동시에 육체의 주인이 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와 영혼 중 어느 한쪽을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되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여 그 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며, 마음속에 참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옴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누가 만드신 것인가? 하나님이 만드신 곳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그 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전도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2:24)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 앞에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돈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한다. 어느 날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이야기를 통해 교훈하신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12:19-20) 우리의 목숨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주님께서 나의 영혼을 취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놓고 이 땅을 떠나야 한다. 자신의 영혼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천국 백성으로서 주님만 잘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하루라도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솔로몬의 부귀

솔로몬은 이 땅에서 큰 부귀를 누린 자이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복을 크게 받은 왕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2:25) 솔로몬이 누린 부는 이렇다.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바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 솔로몬의 일일 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석이요. 살찐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찐 새들이었더라. 솔로몬이 하수 이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하수 이편의 모든 왕이 다 관할한바 되매 저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가 있었으니.”(왕상 4:21-24) 여러 나라의 공을 받았던 솔로몬 왕,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허락하신 분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승리할 것을 선포해야 한다.

 

바람을 잡는 것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많은 부를 누리게 될 수도 있다. 세상의 좋은 것을 잡기 위해 살아가는 자의 삶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전도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2:26)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들이 되면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좋은 것들로 공급받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좋은 것들보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주 안에서 선한 열매가 가득 넘쳐날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으면 주 안에서 어떻게 부요해 질 수 있을까?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3:17) 주님을 좇아가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좋은 것들이 넘쳐나기를 위해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세상을 좇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알기 위해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의인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나에게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올지라도 나의 삶의 모든 부분을 아시며 행한 대로 보응해 주실 주님을 바라보며 승리해야 한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3:10-11) 지금까지 잘못 살아 온 것들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바람을 잡으려고 나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넉넉히 주님 주신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세상이 점점 타락의 길로 향하는 것은 쾌락의 탐닉성 때문일 수 있다. 한번 쾌락에 빠진 사람은 좀 더 자극적인 쾌락을 맛보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게 된다. 부를 얻은 사람은 다시 권력을 얻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그것을 얻은 사람은 또다시 육체의 쾌락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좇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디서도 결코 완전한 쾌락을 얻을 수는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이 주는 쾌락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국은 파멸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참된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항상 즐겁고 기쁜 삶을 누리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뛰어난 지혜로도 만족을 얻지 못한 전도자는 쾌락과 물질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절제와 하나님 없는 물질은 헛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전도자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다짐을 해야 할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자족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의 나라를 날마다 경험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4:17-18) 우리가 구할 때 주님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하나님의 도움을 입기 위해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6.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요일 4:9),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천국백성의 삶을 살게 됨을 믿고(고후 5: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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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위로와 소망, 신랑이 되시는 주를 알고

성경: 호세아 2:14-21

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2: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2: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2: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2: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1. 울고 있는 소녀

스코틀랜드의 동양어학자인 덩컨박사는 자신의 부족을 느껴 성만찬에 참례하지 못하고 강대 밑에 가엾은 모습으로 앉아만 있었던 일이 있었다. 그때 덩컨박사는 한 소녀를 보았다. 한 소녀가 울면서 포도즙을 마시지 않고 잔을 그대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덩컨박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보지는 않고 자신의 죄지은 모습만을 보고 울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자기 안에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덩컨박사는 소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녀야 그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죄인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고요한 음성으로 부르짖은 후 자기도 그 잔을 받기 위하여 손을 내밀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우리 가운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 징계 후의 자비

본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와 함께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목적이 그들의 믿음의 정화에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상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방인들의 풍습을 좇아 우상을 숭배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시어 열창으로 흩어짐을 당하게 만드시겠다는 경고하셨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사십년을 지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목이 굳어 신앙의 연단을 통해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도 이스라엘 백성을 정화시켜 새롭게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본장에는 음녀 고멜을 비유한 하나님의 경고가 계속 소개되고 있다. 특히 본장에서는 긍휼과 사랑을 베풀기 전에 생명의 근원을 우상으로 인정해 버린 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로만 끝맺음하는 것이 아니고 징계 후에 자비를 베풀어 언약을 갱신하시고 지극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우상 숭배에 철저하게 물들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을 잠시 지연시키고 하나님의 징계를 임하게 하겠다는 경고의 부분(1-13)과 징계의 목적이 회개를 통한 구원과 언약의 회복에 있음을 보여 주는 부분(14-23)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치 않은 자와는 결코 교제를 나누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오직 죄를 진심으로 회개한 자와 언약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가고 계시길 원하실 뿐이다.

 

3. 위로와 소망 되신 주(14-15)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 되시는가? 우리 하나님은 위로와 소망이 되는 주님이시다. 호세아는 어떤 선지자였는가?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언한다. 호세아는 Hoshea(인명) (['vE/h, Hoshea), [] @Wshe(Hosee)구원이다. 그는 브에리의 아들로서 선지자이며 유대 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치세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치세에 예언 활동을 하였다(1:1). 호세아 선지자는 북조 이스라엘의 시민이었는데 그가 그 나라의 선지사역을 60, 혹은 65년 동안 하는 중에 북조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예후의 집을 거스려 예언하였다(1:4). 그는 여로보암의 치세 동안 적어도 12-3년간 예언하고, BC 722년 사마리아의 붕괴를 보기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는 그의 예언자로서의 봉사는 40년간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호세아는 남조 유다에서 활동한 이사야와 동시대(1:1, 1:1), 즉 그가 예언 활동을 했을 때의 여로보암 1세와 웃시야는 동시대였으나, 호세아의 예언활동 개시는 이사야의 그것보다도 빠르고, 또 그 끝도 이사야가 그 활동을 끝맺기 훨씬 이전인 것 같다. 그는 또 북 왕국에서 예언한 아모스, 남조에서 예언한 미가와도 동시대였다.

호세아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참혹하고 비극적인 것이었는데 인간 존재를 근저에서부터 뒤집어엎을 정도의 극렬한 것이었다. 따라서 호세아의 선교는 다른 선지자들보다도 매우 개인적 색채 시랑, 진노, 배신과 이탈에 대한 정열적인 생각, 즉 이율배반적인, 이것인가 저것인가라는 갈등이 특징이다. 호세아는 이 격정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았으며, 환언하면 여호와께서는 호세아를 여호와 자신의 페이도스(Pathos) 안에 포착한 것이다. 따라서 호세아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말씀은 작열적인 사랑인데, 이것이 호세아의 예언 전체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다하지 않는 사랑을 호세아는 결혼이라는 영원한 비의를 이스라엘 사상 처음으로 써서 표현했다.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위로의 주님이 되신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2:14)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를 귱휼히 여기시는 좋으신 주님이 되신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49:13) 우리는 이렇게 좋으신 주님을 즐거워하며 감사하고 소리 높여 노래 할 수 있어야 한다.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51:3)

 

소망의 문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문이 되어 주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의 문이 되어 주신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2:15)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거기서 그녀에게 포도원을 되돌려 주고 고난의 골짜기를 희망의 문이 되게 하겠다. 저가 어렸을 때와 같이, 이집트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거기서 노래할 것이다.”(2:15)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아간이 죽은 곳, 그곳이 아골 골짜기이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7:26) 우리가 주님을 기대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우리를 살리신다.

우리 주님은 살리시는 주님이 되신다. 여호와의 영이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려갔고 에스겔은 그 곳에서 뼈들을 보게 된다. 하나님과 에스겔은 이러한 대화를 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37:11-14) 우리는 삶 가운데서 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문이 되심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갈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0:9) 우리의 삶 가운데 위로와 소망의 주님을 붙잡고 반드시 승리할 것을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신랑 되신 주(16-18)

남편이라 일컫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 되어주시는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는 신랑이 되신다. 죄악에서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가면 우리는 신랑 되신 그분의 신부로서 살아갈 수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2:16)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남편이 되신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54:5) 우리는 정결한 처녀로서 한 남편인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좋으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자들로 살아가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우리는 신랑 되신 주님 한분으로만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19:7)

 

바알들의 이름을 입에서 제거

우리는 무엇을 멀리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피조물들이 우상숭배 하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대하여 직접 심판하기도 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2:17) 피조물들은 다른 신들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참 신으로 선택하여 반드시 생명이 되시는 주님으로 인한 마음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16:4) 우리 주님은 홀로 높임을 받아 마땅하신 존귀한 주님이 되신다. 그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2:11)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부분에서든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겠다고 작정하시면 그 뜻은 반드시 성취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피조물들은 이 땅 가운데 있는 모든 우상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10:11)

 

전능자의 그늘

우리 하나님은 누구의 그늘이 되어 주시는가? 약속의 주님은 전쟁을 멈추게도 하시는데 주님은 믿는 자들의 편이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2:18) 공동번역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 날이 오면, 너는 나를 주인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낭군이라고 부르리라. 야훼의 말씀이시다.”(2:18) ‘에게 쉼이 필요한가? 주님은 능히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좋으신 분이시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23:2) 전쟁을 쉬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는 주님을 붙잡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46:9)

를 살리실 능력이 있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서 안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모세의 시는 이렇게 기록한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91:1-13) 신랑 되신 주님을 사모하며 우상을 제거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서 승리할 것을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 여호와를 알고(198-20)

우리 모두는 여호와를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승리해야 한다. 주님과 잘 연합함으로 주님을 점점 더 깨닫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2:19-20)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너무나도 크다. ‘를 살리시기 위해서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믿음생활에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3:25-26)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었는가? 징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징계는 성도들의 믿음을 훈련시키고 더 나아가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받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대할 때 축복의 약속과 심판의 경고를 동시에 주심을 깨닫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구속 받은 자로서 주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승리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1:7-8) 성령님의 도움으로 위로와 소망, 신랑이 되시는 주를 알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모두가 그분을 최고로 사랑하고 그 분을 잘 섬기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요일 4:9),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천국백성의 삶을 살게 됨을 믿고(고후 5: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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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평강과 위로의 주님 앞에서

성경: 이사야 57:14-21

57:14 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57:16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57:17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57:18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57:19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57:20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1. 소리

인도가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을 때였다. 그때 인도인들의 폭동이 일어나 영국인들은 럭노우라는 도시에 포위되어 전멸의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작은 스코틀랜드아가씨가 땅바닥에 엎드려 한참 귀를 대고 있더니 갑자기 얼굴이 환해져서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디나, 저 소리가 들리니? 디나, 저 소리가 들리냐구?’ ‘무슨 소리 말이냐?’하고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군인이 부는 풍적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그 소리는 그녀가 어릴 적에 고향에서 군인들이 지나갈 때 들은 소리로, 그들의 구원을 알려 주는 기쁨의 소리였다. 지금 그대들에게 오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며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구원의 하나님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의인의 죽음을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음으로 범죄를 더하였음을 책망한다. 그리고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시어 다시 위로와 구원을 베푸실 것을 예언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은혜를 증거 하였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의인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편히 쉬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1-2). 한편, 이사야는 인간의 불신앙을 음녀의 음욕에 비유하여 맹렬히 경고한다. 신앙의 순결을 지키지 않고 각종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상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3-10).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인을 모두 심판으로 휩쓸어 버릴 것이며, 진실한 신앙인에게는 축복을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셨다(11-13).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다시 한 번 선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길을 인도하시고, 통회하는 자를 복 주시고, 패역했던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길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악인에게는 요동치는 불안감만 있고 평안이 없으리라고 하였다(14-21).

 

3. 위로의 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다. 이사야는 Esaias(인명) (Why:[]v'y], Esaias)여호와의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다.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주로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며 이사야서의 저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할 것임을 예언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포로 된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약속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의 포로가 되게 하신 것은 그들이 죄악을 스스로 깨달아 회개케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죄악을 해결하시고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을 베푸심으로써 죄악 가운데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거치는 것을 제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치는 것을 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는 분이시다. “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57:14) 우리는 주를 위해 걸림돌을 치워버리고 만민 앞에 주를 위해 깃발을 들며 나아가야 한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62:10)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를 즐겨하며 바른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13)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행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을 믿어야 한다.

 

통회하는 자

우리는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기뻐하신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57:15)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주님 앞에 통회하는 자들이 되어 날마다 의 마음이 변화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신중의 신이신 우리 하나님과 비교할 자는 아무도 없음을 고백하며 오직 그 분만을 겸손한 마음으로 찬송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15:11) 우리는 상한 마음을 가지고 주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34:18) 주님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받으시고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51:17)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주와 같으신 분은 없음

이 세상에 주와 같으신 분은 있을까? 사람들은 의 마음을 다 알아주지 못한다. 때로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정죄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를 사랑하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57:16) 긍휼의 하나님은 벌하심 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며 인자하신 주님이 되시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듯이 주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 되신다. 다윗은 자신의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한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103:9-16) 노를 항상 품지 않으시는 주님을 높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입술을 가지고 아름다운 생각, 아름다운 고백만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7:18) 이 땅에 주와 같으신 분이 없음을 고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탐심을 물리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는 속사람의 변화를 위해 성령님을 의지하고 날마다 기도해야한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숭배 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 안에 있는 탐심을 물리쳐서 날마다 성령으로 변화를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탐심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했다. 우리는 마음이 강퍅해 지면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고 자기의 길로 계속 행할 수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57:17)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악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9:13)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이 가득한지 아니면 죄악된 것들이 가득한지 살펴야 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5:3-5) 속사람을 점검하며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한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12:15) 탐심을 물리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들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삶을 살 것을 선포해야 한다.

 

4. 평강을 주시는 주(18-2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평강을 주신다. 그러나 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하여 평강이 없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악인의 평강 없음을 이사야 선지자는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고 묘사한다. 바다는 두려움과 근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죄 씻음의 은총을 받지 못하므로 인간의 본질적인 두려움인 죽음의 권세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되 뛰어난 평강을 주시는데, 이 평강은 성도가 영원한 천국에서 맛보게 될 영적인 기쁨으로서 세상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기쁨이다.

 

위로의 주

우리 하나님은 위로의 주님이 되신다. ‘를 고치시고 를 인도하시며 를 가르치시며 바른 길로 가게하실 주님을 신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57:18) 슬픔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안으시고 위로해 주실 것이다. ‘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서 샘물 근원으로 를 인도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주와 함께 할 때에 목마름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49:10) 우리는 구원의 주님, 회복시키실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복된 삶을 살 것을 선포해야 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12) 슬픔 대신 희락을 주실 주님을 기뻐해야 한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61:2-3) 우리가 주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에 주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평강의 주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주님이 되신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57:19)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예수님은 물과 피를 쏟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2:14-17)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평강을 허락하신 주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사랑을 전하는 복된 발걸음을 걸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10:5-6) 우리는 평강을 주시는 주님을 잘 전파하며 원수까지 사랑하고 평안을 빌어주는 복된 삶을 살 것을 선포해야 한다.

 

악을 행하는 자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 악인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 가운데 거할 수 없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57:20)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길을 선택하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한다. 악인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악인들은 악을 행하기만을 힘쓰며 악을 행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4:16-17) 그러나 악인에게는 화가 있고 행한 대로 주께서 보응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3:11)우리는 악인에 속하여 하나님께 칭찬받지 못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께 축복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평강이 없는 악인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고 성령님께서 마음을 주관하시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57:21) 우리는 악인의 길은 파멸과 고생이며 평강의 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3:16-17) 우리는 깨어 있는 주의 제자들로서 근신하고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56:10) 우리는 죄를 사랑하는 악인들이 되지 말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주님 앞에 엎드리어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주님 안에 거하여 이 땅 가운데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성령님을 의지하며 한 걸을 한 걸음 걸어가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 반석이신 주를 찬양

우리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분의 은혜로 인해 구원의 위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 받은 평강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살아갈 때 천국의 평강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 순종함으로써 주님과 늘 동행할 때 평강이 넘쳐나는 삶, 위로의 주님을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주님과 같은 분은 없으며 주님이 우리의 반석이 되심을 믿어야 한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우리는 반석이 되시는 주를 높이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3:15) 좋으신 주님을 날마다 찬양하며 평강과 위로의 주님 앞에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요일 4:9),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천국백성의 삶을 살게 됨을 믿고(고후 5: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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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TV/설교문 | Posted by 데일리 푸드 2016. 8. 31. 14:00

부르심에 반응하는 삶!, 마태복음 9:9-13

말씀: 부르심에 반응하는 삶!

성경: 마태복음 9:9-13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 병원

병원은 병든 환자들로 가득 차서 그들의 신음 소리와 악취가 나는 곳이다. 그런데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 분위기를 싫어하여 환자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병원의 가치는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온다 해도 그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여 복음을 심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때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복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

본장은 전장인 8장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과 죄와 죄의 올무에 대한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을 여러 사건을 통해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요, 인류를 구원하실 참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과 함께 죄인이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자이라는 것과 구원에 이를 자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를 은유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본 동네로 오셨다(1). 사람들이 침상에 중풍병자를 메고 오는 것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시고 병을 고쳐 주셨다(2-8). 예수께서 마태라는 세리를 제자로 삼으시고 그의 집에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자 의원은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신다(9-13).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의 문제로 예수께 질문하자 예수는 당신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신다(14-17). 또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 주신다(18-26). 그 후 예수께서는 두 소 경을 고치시고, 벙어리를 고치시고,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27-38).

 

3. 부르시는 예수님(9-11)

예수님은 어떠한 삶을 사셨는가? 예수님은 세리나 창기,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같이 사람들이 멸시하거나 가까이하기 싫어하는 이들과 같이 지내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구원을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하고 죄에 억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의롭다 생각하며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의 죄를 자복하며 마음을 비우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

예수님은 12제자 중 1명에 속했던 마태를 부르신다. 마태는 세리였는데 그의 사회적 신분과 무관하게 예수님은 마태를 부르셨다. 그 당시 세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인이었던 마태를 부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부르심 앞에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며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9:9) 마가복음에서는 마태를 레위라고 기록하며 부르심의 장면을 소개한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부르며 자신을 좇으라고 말씀하신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2:14)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거부하지 않고 바르게 반응한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모든 것을 버리고 제자가 되었다.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5:27-28)

성경에는 예수님이 부르셨던 다른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이름은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다. 어느 날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던 예수님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다. ‘나를 따라 오너라.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앞에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게 된다. 잠시 후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다. 그들 또한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게 된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4:18-22) 예수님의 부르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우리 또한 를 부르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주님을 잘 좇는 복된 삶을 살 것을 선포해야 한다.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 복음을 전파하는 생활을 하시며 누구와 함께 하셨을까?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볼 때 연약한 자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도 하시며 사역을 잘 감당하셨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5:29) 세리 레위(마태)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고 다른 사람들과 또 다른 세리도 함께 참석했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5:29) 예수님은 이방인들과 죄인들도 사랑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이방인과 달라야 함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5:46-47) 우리는 죄인들과 즐겨 식사하셨던 예수님, 죄인인 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선포해야 한다.

 

비판하는 바리새인들

죄인들과 식사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 이러한 모습을 보는 바리새인들의 시선은 좋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판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9:11) 죄인들과 함께 했던 예수님을 바라보던 그 당시 사람들의 견해는 이러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1:19) 사람들 눈에는 예수님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진정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은 죄인의 집을 방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수군거린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19:7)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비판하는 자들에게도 예수님은 사랑으로 대하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는 큰 무리가 모여 들었는데, 율법만 잘 지키는 삶을 살았던 자들과 종종 변론이 생기기도 했다.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9:14-16) 우리는 비판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묵묵히 사역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변론을 즐겨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충성된 주님의 일꾼들이 될 것을 선포해야 한다.

 

4. 예수님이 필요한 자(12-13)

예수님은 병든 자들에게 관심이 있으셨다. 예수님은 왜 어두움에 눌린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을까?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에게 접근한 것은 그들이 고통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심한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 중에 인생의 고통을 짊어지고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실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그 고통의 질고를 벗겨 주실 주님을 영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병든 자에게 필요하신 예수님

세리들과 식사하는 자신들을 비판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9:12) 예수님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자유하게 하는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함 받고 자유하게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자세로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다. 우리는 주님께 어떠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8:11-13) 바리새인은 자신의 옳은 행실을 드러냈고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아뢰며 기도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자기 행위의 옳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던 세리와 같이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한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41:4) 우리는 의 영혼을 고치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147:3)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9:11) 의 모든 병을 고치시고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 것을 선포해야 한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러 오셨는가? 죄인 된 를 부르러 오셨음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자신의 모습이 의인처럼 보이는 자들은 회개해야 한다. 자기의 의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은 그 의로움을 내려놓고 자신이 얼마나 허물 많은 연약한 자인지 깨달아야 한다. 어느 정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들 가운데 단 한번이라도 죄를 지은 자들이 있다면, 그 순간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중 하나도 죄인이 아닌 자들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야만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55:6-7) 우리 가운데 악의를 행하기를 즐기는 자들이 있다면 회개하고 주님께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일백 마리의 양 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그 양을 더 소중히 여기며, 한 마리의 양이 돌아왔을 때 더 기뻐한다고 말씀하신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8:12-13) 우리를 오래토록 참으시고 회개하기를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깨달아야 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죄인인 나를 불러주신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반드시 이 땅 가운데서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면서 승리할 것을 선포해야 한다.

 

5. 구원의 주님

우리 주님은 구원의 주님이 되신다. 우리 중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누구인가? 고통 가운데 있는 병든 자만이 예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자, 삶의 소망이 없어 고통을 받는 자, 사랑을 줄 사람이 없어 고통을 받는 자들, 모두가 우리 예수님이 필요한 자들이다.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사랑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만나주심을 믿어야 하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게 잔치가 열리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 예수님께서 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음을 믿어야 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지금도 죄인을 찾고 계시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바르게 반응하는 자들이 되어, 왕 되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 땅 가운데서 나그네의 삶을 사는 동안 믿음생활에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요일 4:9),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천국백성의 삶을 살게 됨을 믿고(고후 5: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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